PEOPLE : Yves Saint Laurent

By | 3:05 AM Leave a Comment






"블랙이라는 말엔 하나가 아니라 무수히 많은 색이 존재한다"


입생로랑은 무명시절인 1953년 크리스찬 디올, 지방시, 
쟈크파트등이 심사위원으로앉아있는 신진 디자이너 콘테스트에서 
슈퍼루키 디자이너들을 재치고 당당히 3등을 차지해 업계를 놀라게 한 장본인이다.

그 후 보그의 편집장인 미셸 드 브루노프(Michel De Brunhoff)의 눈에 띄게 된다.

입생로랑은 어릴적 가족과 함께 본 연극무대에 매료되
혼자의 힘으로 무대와 의상, 등 미니어쳐를 만들게 되었고, 후엔 취미로 옷을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1953년 그의 어머니의 제안으로 콘테스트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대회에서 당당히 3위를 차지하고, 브루노프의 조언을 들은 그는
패션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고, 다시 열린 콘테스트에 참가해 칼라거펠트와
함께 부분 1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브루노프가 그를 축하해주며 그의 디자인 스케치를 보고는 그를 디올에게 소개
시켜줘 입생로랑은 디올과 완벽한 콤비를 이뤄 오뜨꾸띄르를 진행하게 되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4년후 디올이 죽게 되고, 사람들의 추천으로 21세의 입생로랑은
프랑스의 거대브랜드 디올의 수장이 된다.

그렇게 그의 첫번째 컬렉션에서 트라페즈라인이 선보여졌고, 그는 국제적으로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시 3년후인 1960년. 그는 전쟁에 착출 되었지만
평소 내성적인 입생로랑은 신경쇠약에 걸려 병역을 3주만에 마치게 되었다.
하지만 입생로랑은 디올하우스가 아닌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되었고, 그곳에서
받은 각종 약물치료가 후에 그의 약물중독에 한몫을 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생로랑이 다시 디올을 찾았을땐 이미 수석디자이너가 "마크보한"으로 교체된
후였고, 일방적인 계약파기로 디올에게 68만프랑을 받은 입생로랑은 자신의 이름을 건
입생로랑 오뜨꾸띄르 하우스가 탄생하게 되었다.(이떄 함께한 사업파트너는 그의 반려인인
피에르 베르제.)


입생로랑이 생겨난 후 입생로랑이 한 일은 정말 대단하다.

여성의 수트라면 당연히 자켓과 스커트가 한벌이어야 했지만
입생로랑은 당당히 턱시도처럼 하의를 바지로 만든 "르 스모킹"은
입생로랑의 가장 멋진 아이콘이다.






그리고 입생로랑은 1966년 "생로랑 리브고슈"를 런칭해 프레타 포르테에도 입성했다,
또 입생로랑은 런웨이에 세계 최초로 흑인 모델을 세운 디자이너이기도 하다.

이런 혁명가같던 입생로랑은 1990년대 이후부터 경영 위기가 오며 엘프 사노피, PPR그룹등에매각하게 되었고, 현대 패션계에 질릴만큼 질려버린 그는 2002년 패션계를 떠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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